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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세월이라는 말이 나를 발견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는구만. 심란하게도.
타인의 고통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후, 2004)』에서 매스미디어를 바라보며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행위, 살아남은 혹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로 고통의 근본원인은 그대로 둔 채 단지 연민하는 포즈만 취하는 것이 주는 가증스러움을 거부하라는 말이다. ‘실천 없는 연민’은 ‘자기 연민’이자 ‘자기애’의 발로이고, ‘연민 없는 논리’는 잔인하다.
‘엄살’이란 ‘아픔이나 괴로움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보다 보태어서 나타내는 태도’를 일컫는다. 엄살이란 전체를 뜻하는 ‘온(온 세상의 온)’과 ‘살갗’이 합쳐진 ‘온살’이란 말이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준비한 작가들은 그들이 이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온살(엄살)쟁이’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타인이 얼어 죽어도 우리는 그와 상관없이 살 수 있다. 파업을 주도할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언론인이 일요일 오전 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잡혀가도 누군가는 여전히 평온한 아침을 맞이한다.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아니므로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다면 엄살이란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 혼자만 도덕적인 척 한다거나 위선이라고 지적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엄살'이란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이다. 연인과 다툰 뒤 전화를 받지 않아 애태우던 불통의 기억, 가난하여 차별받았던 기억, 급작스러운 실직으로 고통 받았던 기억, 이런 기억을 실제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 엄살의 힘이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우리는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을 통해 내 일이 아닌 일에도 내 일처럼 아파할 수 있다. 인간이 꿈의 세계에서 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꿈꾸지 못하는 자들의 현실론이야말로 상상력 부재의 밀폐된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의 답답함을 의미할 뿐이다. 손톱 끝에 박힌 가시 하나에서 온 몸의 통증과 불편을 체험하듯 이 사회의 작은 일부가 아플 때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처럼 느낀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포박하여 그려낸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자신이 바라보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진실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진짜 얼굴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사진 너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실에 대해 이제 우리는 답해야 한다.
사진과 글의 출처 : http://windshoes.new21.org
타인의 고통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후, 2004)』에서 매스미디어를 바라보며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행위, 살아남은 혹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로 고통의 근본원인은 그대로 둔 채 단지 연민하는 포즈만 취하는 것이 주는 가증스러움을 거부하라는 말이다. ‘실천 없는 연민’은 ‘자기 연민’이자 ‘자기애’의 발로이고, ‘연민 없는 논리’는 잔인하다.
‘엄살’이란 ‘아픔이나 괴로움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보다 보태어서 나타내는 태도’를 일컫는다. 엄살이란 전체를 뜻하는 ‘온(온 세상의 온)’과 ‘살갗’이 합쳐진 ‘온살’이란 말이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준비한 작가들은 그들이 이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온살(엄살)쟁이’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타인이 얼어 죽어도 우리는 그와 상관없이 살 수 있다. 파업을 주도할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언론인이 일요일 오전 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잡혀가도 누군가는 여전히 평온한 아침을 맞이한다.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아니므로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다면 엄살이란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 혼자만 도덕적인 척 한다거나 위선이라고 지적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엄살'이란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이다. 연인과 다툰 뒤 전화를 받지 않아 애태우던 불통의 기억, 가난하여 차별받았던 기억, 급작스러운 실직으로 고통 받았던 기억, 이런 기억을 실제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 엄살의 힘이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우리는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을 통해 내 일이 아닌 일에도 내 일처럼 아파할 수 있다. 인간이 꿈의 세계에서 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꿈꾸지 못하는 자들의 현실론이야말로 상상력 부재의 밀폐된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의 답답함을 의미할 뿐이다. 손톱 끝에 박힌 가시 하나에서 온 몸의 통증과 불편을 체험하듯 이 사회의 작은 일부가 아플 때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처럼 느낀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포박하여 그려낸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자신이 바라보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진실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진짜 얼굴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사진 너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실에 대해 이제 우리는 답해야 한다.
사진과 글의 출처 : http://windshoes.new21.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