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고재와 술을 마시다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애초에 늦은 시간에 만난데다 1차로 회식을 뛰고 왔던 고재가 어지간히 개판이었으므로
간단히 맥주만 두 병 정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옆 테이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는지 거칠게 달리고 있었다. 소리도 꽥꽥 지르면서.
내가 한창 술 처먹고 다닐 때 다른 이들이 나를 보는 기분이 이랬었겠구나-_-하고 정성 들여 양코치를 굽는데,
그들이 술값을 치르고 나가는 동안에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그 일행 중 하나가 우리 테이블에 놓여있던 칭따오 병을 건드려 땅에 떨어뜨려버린 것이다.
묵직한 초록색 병은 떨어지며 절묘하게도 곱게 벗어두었던 고재의 코트에 추락했다.
찰나의 순간에 셋이 다 놀랐다; 용산에서 제일가는 땅부자인 고재의 코트는 분명 예사 가격이 아닐 터,
술이 꽤 오른 상태로 보이는 그 여자가 어떻게 대처할지 적잖게 궁금했다.
코트를 버린 대가로 맥주 값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내심 쾌재를 부른 게 사실이다-_-

하지만 안타깝ㄱ.. 아차차;; 다행-_-스럽게도 맥주병은 비어있었다.
그러니 분명 병은 코트에게 타격을 가했으되 손해는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옷은 다름 아닌 코트 아니던가.
티셔츠는 몇 벌씩 가지고 있다. 청바지도 서너 벌 있다.
하지만 코트는 언제나 한 벌뿐이다. 옷이란 모름지기 대체 가능한 수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그러니 그냥 넘어가기에도 애매했다는 얘기다.

그녀는 다행히 개념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연신 죄송하다면서 지갑을 꺼냈다.
그러더니만 세탁비! 세탁비!를 외치는 내 눈길을 외면한 채 능숙한 손짓으로,

본인의 명함을 꺼내주었다. "문제 있으면 연락주세요."

아 애매하다.
여기서 억지로 트집을 잡아 기어코 드라이클리닝을 맡겨 명함에 적힌 사무실 번호로 전화를 걸어
"저기 죄송합니다만 지난 주말에 당신이 망쳐놓은 내 옷이; 세탁소로 들어갔군요;
비용은 이러이러하니 계좌이체 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배짱을 가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_-

나는 괜히 올 생각도 없었던 맥주 값에 깊은 탄식.
게다가 이미 취한 고재는 명함도 받는 둥 마는 둥;

비록 그 여자분이 기억에 남는 미인은 아니었으나, 그 명함을 뽑는 손짓이 기억에 남았다.
시크한 도시 직딩은 문제가 생길 경우 절대로 당황하지 않고
차가운 스댕 명함 케이스에서 이렇게 연락처를 꺼내줍니다. 어때요? 참 쉽죠?
직딩들은 그런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_-